과도한 자의식이 브레이크를 건다

우리는 나에 대한 집착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해야 된다.

우린 자신을 혐오하기 때문에 자기만을 바라보는 성향이 있다. 자신감이 없으니깐 자의식 과잉에 빠지는 것이고...

ex) 쓸데없이 회의 때 손드는 것, 가벼운 농담 날리는 것도 주저하게 되고

늘 자의식이 브레이크를 걸어서 일거수일투족을 얽어 맨다.

 

 

자기긍정이 아닌 자기수용을 하라

우린 있는 그대로의 나, 자연스러운 나에 대해 자신이 없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나인 채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회피하고 있다.

결국 동동체 감각이 필요하다. 자기에 대한 집착에서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돌리고, 공동체 감각을 기르는 것.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

 


자기수용: 우린 주어진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나에 대한 견해를 바꾸는 것. 쉽게 말해 사용 용도를 바꾸라는 것이다. 자신을 긍정할 필요보다는 자기 수용을 해야한다.


자기긍정: - 나는 할 수 있다, 강하다 스스로 주문을 거는 것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자칫 우월 콤플렉스에 빠질 수 있다.

 

자기수용은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는 일은 없다. 나를 60점으로 받아 들이고 100점에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방법을 찾는 것이 자기 수용이다.

 

60점이라 비관할 필요없다. 인간은 누구나 '향상 되기를 바라는 상태' 에 있다. 100점 만점인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우린 '변할 수 있는 것',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 없다.

바꿀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해라.

'이런 나' 를 받아 들이는 것.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낸다. 이것이 자기 수용이다.

 

우리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이다. 모든 것은 '용기' 의 문제다.

 


신용과 신뢰는 어떻게 다른가

자기에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돌릴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두 번째 키워드 '타자신뢰'

우린 신용이 아닌 신뢰로 인간을 믿어야 한다.

신용은 은행의 이자와 같은 개념

신뢰는 다른사람을 믿을 때 조건을 일절 달지 않는 것이다. 물론 배신당할 수 있고 손해를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믿음을 유지하는 태도를 신뢰하고 부른다. 


신뢰의 반대는 뭘까? -> '회의' 

친구를 의심하고, 남을 의심한다면 상대방은 바로 알아찬다. 나를 신뢰하지 않는구나하고 발전적인 관계가 만들어 지지 않는다.!


우리는 조건없는 신뢰를 가져야 한다. 


누군가를 무조건 신뢰해봤자 배신당할 뿐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그런데 배신할지 안할지 결정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건 타인의 과제이다.


나는 그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만 생각하면 된다. 이것도 과제의 분리다.

과제를 분리할 수 있게 되면 인생은 놀랄만큼 단순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신뢰하는 것을 두려워하면 결국은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다.

타자신뢰를 통해 더 깊은 관계속으로 들어갈 용기를 가질 때 인간관계의 즐거움이 늘어나고, 인생의 기쁨또한 늘어나게 된다.!!!


자기수용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면, 배신이 타인의 과제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고, 타인을 신뢰하는 길로 들어서는 것 또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의 본질은 타인에게 공헌하는 것

자기수용과 타자신뢰를 했다. 

그렇게 되면 교환불가능한 이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이 자기 수용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조건 없이 신뢰하는 것이 타자신뢰다. 


자기를 받아들일 수 있고, 타인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이럴 경우 자네는 타인에게 어떤 존재일까?-> 곧 타인을 친구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소속감을 얻게 된다.


타인을 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수용도 하지 못하고, 타자신뢰도 하지 못한다.

그런데 타인을 신뢰하는 것만으로 소속감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 감각을 키우기 위해서 타자공헌이 필요하다.

친구인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것, 공헌하려는 것. 그것이 타자공헌이다.


근데 자기희생을 해서 공헌하는게 아니다. 아들러 역시 자신을 희생해서 타인을 맞추는 것은 사회에 지나치게 적응한 사람이라 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나 행동이 공동체에 유익하다고 생각했을 때에만, 다시 말해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겨질 때에만 자신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


즉 타자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이다.


타인에게 공헌하는 것이 나를 위한것이다. 즉 자기를 희생할 필요가 없다.


예로들면 가장알기 쉬운 타자공헌은 '일'이다. 

사회에 나가서 일하는 것, 집안일, 노동.

노동이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 타인에게 공헌하고, 공동체에 헌신하며,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 는 것을 실감한다. 나아가서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받아들이게 된다.


왜 일하는걸까??

타자공헌을 위해서이다.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소속감을 확인받고 싶어서이다.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고,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이다. 



젊은 사람은 어른보다 앞서나간다

 위의 논리가 너무 위선적으로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보면, 온가족들이 밥을 먹고 아내가 뒷정리 시작한다. 근데 아무도 안도와준다. 근데 왜 나만 이런일을 하는거지라고 가 아니라, 나는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고있다고 생각해봐라. 가족들로부터 고맙다라는 말을 듣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남이 내게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라, 내가 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해봐라.


그렇게 공헌하고 있음을 느낀다면 눈앞의 현실은 완전히 다른 색채를 띠게 될 것이다. 


왜 그순간 공헌함을 느끼고 있을까? 가족을 친구라 생각하기 떄문이다.


다른사람이 친구라면 어떠한 공헌도 위선이 아니게 된다. 


자기를 수용한다->배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타자신뢰를 할 수 있다 -> 타인을 무조건 신뢰하고 그사람들을 내친구라 여기면 타자공헌을 할 수 있다 -> 타인에게 공헌함으로써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실감하게 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다. 즉 자기수용을 할수있다...


즉 순환고리구조를 가지게 된다.


행동의목표

1.자립할것(자기수용)

2.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것(타자공헌)


위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목표

1.내게는 능력이 있다는 의식을 가질 것(자기수용) //단 단순하고 노력없는 희망적 긍정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말하는 것임 ^^

2.사람들은 내 친구라는 의식을 할 것.(타자신뢰)



인생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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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전부라는 인생의 거짓말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면 불쾌한 일도 겪을 수 있다.

어떤 경우라도 공격하는 '그 사람' 이 문제이지 결코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항상 매사 부정하고 자기비관적인 사람은 인생의 조화가 결열 된 것으로 본다.

유대교 교리중에 열명의 사람이있으면 한사람은 당신을 비판하고, 싫어하고 두명은 더없는 벗이괴고 일곱명은 이도저도 아닌 사람들이다. 


이때 나를 사랑해주는 두 사람에게 집중해야하지 않겠는가?


일중독자. 일을 구실로 다른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집안일, 아이양육, 등등


어느 한 가지만 돌출되는 삶의 방식을 아들러는 인정하지 않는다.

회사의 일에만 몰두하는 것은 인생의 조화가 결여된 삶을 사는 것이다.


물론 일을하게되면 행위의 차원에서 공헌하는것은 맞지만, 존재의 차원에서는 결국 인정받지 못할것이다. (늙어서라든지)

즉 있는것만으로도 '존재의 차원'의의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의 차원을 받아들이냐는 것은 '행복해질 용기'와 관련있게 된다.



인간은 지금, 이 순간부터 행복해질 수 있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로부터 시작. 역으로 말하면 행복 또한 인간관계에 달려있다. 그런데 행복이란 원만한 인간관계인가?

행복이란 공헌감이다.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공헌이 도움이 되는지 안되는지는 타인의 과제이다. 

그냥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 는 주관적인 감각 곧 공험감을 가지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우리는 인정받기를 원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인정받고싶은 이유는 자신을 좋아하고싶다, 자신의 가치를 느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공험감을 원한다.

즉 인정욕구가 공헌감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인정욕구는 남들한테 인정받기위해 발현되는 심리다.


즉 인정욕구를 통해 얻은 공헌감에는 자유가 없다. 우리는 자유를 선택하면서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진정으로 공헌감을 갖는다면 뭐 하러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겠나. 일부러 인정받지 않아도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 고 실감할 수 있다. 인정욕구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직도 공동체 감각을 갖지 못하고, 자기수용과 타자신뢰, 타자공헌을 하지 못한 것이다.




'특별한 존재' 가 되고픈 사람 앞에 놓인 두 갈래 길

 그런데 이런 공헌감으로 인간의 자아실현(큰 업적, 성과, 후세에 남을만한)을 할 수 있는건가?


우선 우리 인간은 우월성 추구라는 보편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향상되길 바라는 마음,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는 마음이다.


아이가 공부나 운동을 잘못하는 경우 태도를 180도 바꿔서 특별히 못되게 군다. 평범한 상태에서 탈피해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런아이들은 건전한 노력은 외면한 채 주목만 받으려 한다. 이를 '안이한 우월성 추구'라고 한다. 수업시간떄 큰소리로 얘기하거나 지우개를 던진다거나... 비행을 지르는 애들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특별한 존재'가 되고싶어서...


'복수'와 '안이한 우월성 추구'는 쉽게 연결된다.


평범해질 용기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평범해질 용기'를 가져라한다. 왜 다들 '특별' 해지려고 할까? 그건 '평범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잘못되는 경우 ' 특별히 못되게 구는' 상태로 빠르게 넘어가게 된다.


자기수용은 평범해지는 것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다. 


평범해지는 것을 거부하는것은 평범해지는 것을 무능해지는 것과 같다고 착각해서이다. 절대 무능한게 아니다. 또한 일부러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할 필요도 없다. 



인생이란 찰나의 연속이다.

 인생을 등산으로 비유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線(줄 선) 으로 파악한다.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시작된 선이 크고 작은 굴곡을 그리면서 정점에 다다르다 그대로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맞이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보는 것은 프로이트의 원인론에 입각한 발상이자 인생의 대부분을 '길 위' 에서 보낸다는 사고방식이다.

인생은 선의 연속이 아니라 점의 연속이다. 찰나의 연속이다. 점이 연속되어 선처럼 보이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삶이란 찰나안에서만 존재한다. 이걸 알지 못하는 어른들은, 선의 인생을 청년들에게 강요한다. 좋은대학, 대기업, 안정된 가정...


그런데 우리 인생 점의 연속이다. 계획적인 인생이란 그것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따지기 이전에 불가능하다 ^^(생각해보니 그렇네)




춤을 추듯 살라

 성공한 바이올리니스터, 축구선수, 만화가 등등 산정상을 바라보고 전진했을까? 아니다.

 그사람들은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살았다. 그들은 늘, 당장 연습해야 할 악보를 보면서 한 곡, 한 소절, 한 음에만 집중했을 것이다. 


인생이란 뱅글뱅글 춤을 추듯이 사는 찰나의 연속이다 .그러나 문득 주위를 돌아봤을 떄 여기까지 왔다니 하고 깨닫게 된다. 




춤을 추고 있는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인생은 키네시스적인 인생이다. 그에 반해 춤을 추는 인새은 에네르게이아적인 인생이라 할 수 있다.


키네시스적인 운동은 종점에 이르기까지 효율적으로 가면된다. 즉 목적지에 도착할때까지의 여정은 불완전하다.

반면 에네르게이아란 지금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가 된 운동을 가리킨다.


달리말하면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이다. 


여행을 하는 목적은 뭔가? 효율적으로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인가? 최단거리 루트로 여행을 한다면 참다운 여행인가?

집에서 나온 순간, 그자체가 이미 여행이다. 목적지를 향하는 과정을 포함하여 모든 순간이 여행이다. 어떤 사건이 생겨 정말 가려던 피라미드를 못다더라도, 여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것이 에네르게이아적인 인생이다.


등산을 키네시스적 행위로 본다면 헬기타고 가면 그만이다...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 라이트를 비추라

극장무대를 생각해보자. 나한테만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앞줄 뒷줄 조차 안보인다.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 과거와 미래가 보인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좀 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 과거가 보이는 것 같고, 미래가 예측되는 듯한 기분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지 않고 희미한 빛속에 살 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결국 남들이 사는 인생 루트를 따라가고 있다는 말도 되겠다..., 즉 그들은 지금, 여기를 집중을 안했을 것이고 그저 흘러가는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라는 주측이 된다.)


과거와 미래를 봄으롰머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려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산다면 과거와 미래는 아무런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원인론을 따라간다면, 흐릿한 미래가 보일 것이고, 이러니까 이대로 살수밖에없다는 환경탓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점의 연속이며, 찰나의 연속이다. 


지금의 잘못된 생활양식은 직선처럼 보이는 과거의 삶에 대해서 나 자신이 '바꿀 수 없다' 는 결심을 번복한 결과이다. 하지만 앞으로 펼쳐진 인생은 완전히 백지 상태에 놓여있다.


지금 여기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는 것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진지하고 빈틈없이 해나가는 것을 뜻한다.




인생 최대의 거짓말

어떤 대학에 들어가고싶은데 공부를 하지 않고 있다면,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태도가 아니다.

먼 일일 수 있다. 하지만 매일 조금이라도 좋으니까 수식을 풀고 단어를 외운다. 즉 춤을 추면 반드시 '오늘 해낸 일' 이 있을 것이다. 


오늘이라는 하루는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절대 먼 장래에 있을 대학입시를 위해서가 아니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산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먼 장래에 이룰 목표를 설정하고 지금은 그 준비기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건 인생을 뒤로 미루는 삶의 방식이다.

지금 여기는 준비기간이고 참는 시기라고 여기고 있으니깐..


그런데 먼 장래에 있을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하는 지금 여기도 이미 내 삶의 일부이다. 


춤을 출 방향을 모르겠다고? 목표 같은건 없어도 괜찮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사는 것, 그자체가 춤이다.

심각해질 필요 없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생을 마친다고 해도 불행하다고 할 것 까진 없다. 모두 완결된 삶이며 행복한 삶이다.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았다면, 그 찰나는 늘 완결 된 것이라는 말이다.)


인생의 최대 거짓말, 그것은 '지금, 여기' 를 살지 않는 것이다.


과거를 보고, 미래를 보고, 인생 전체에 흐릿한 빛을 비추면서 뭔가를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지금, 여기를 외면하고 있지도 않은 과거와 미래에만 빛을 비춰왔다.


자신의 인생에 더없이 소중한 찰나에 엄청난 거짓말을 한것이다. 인생의 거짓말에서 빠져나오고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라.



무의미한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라

인생의 의미는 없다. 어떤 상황이든 우리는 무엇인가 행동을 취해야 한다. 

곤경에 처했을때 앞을 보며 이제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를 생각 해야 된다. 

그래서 아들러는 일반적으로 인생의 의미는 없다고 답하고는,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생의 의미는 내가 나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 의미같은 것은 없지만 내가 그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다. 


그런데 무의미한 인생에 어떻게 그에 걸맞는 의미를 불어넣을 수 있을까?


아들러는 길잡이 별이라는 것을 제시했다.

여행객들이 북극성에 의지해 길을 나서듯...


그별은 바로 타자 공헌이다.


내가 어떠한 찰나를 보내더라도, 자네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공헌한다'는 길잡이 별만 놓치지 않는다면 헤멜 일도 없고 뭘 해도 상관없다.


내 하늘위에 타자공헌이라는 별을 걸면, 늘 행복이 함께하고 친구도 함께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춤추고, 진지하게 사는 것이다. 과거도 보지말고 미래도 보지말고 , 완결된 찰나를 춤추듯 사는 것이다. 누구와 경쟁할 필요도 없고 목적지도 필요없다. 춤추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하게 될 테니까!


아무도 모르는 어딘가에!!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아무리 돌이켜 봐도 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건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SW를 하려했는데 C&I에 온것처럼)


찰나를 춤춰온 결과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인생의 의미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춤췄을 때에만 명확해지는 것이다.


내가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 세계란 다른 누군가가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힘으로만 바뀔 수 있다 라는 뜻이다.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적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말고.


'지금, 여기'는 환하게 빛나고 있다. 내일의 일 따위는 보이지 않을 만큼 강렬하게!

개인 심리학과 전체론

과제의 심리학은 너는너 나는나 선긋기 아닌가? 개인 심리학은 개인을 고립시키는게 아닌가?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은 모두 하나다. 인간은 통일된 전체이다.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나와 감정을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잠시 화가나서 그랬다. 감정에 치우쳤다(이는 말이안된다.)

전체로서의 나를 생각해라.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하다. 너무 밀착되어 있으면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도 곤란하다. 과제의 분리는 타인을 밀어내는 발상이 아니다.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의 실타래를 푸는 개념이다. 


과제의 분리는 인간관계의 출발점이다.



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을 향한 것

출발은 과제의 분리. 그렇다면 목표는? '공동체 감각'에 있다.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 개념이다.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거기서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공동체 감각' 이다. 

보통 우린 공동체라 하면 가정, 학교, 직장, 지역사회를 생각한다.

아들러는 가정이나 학교, 직장,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국가와 인류 등을 포괄한 전체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축, 나아가서는 동식물과 무생물까지도 공동체에 포함된다고 했다.


다시말해 '공동체'라고 했을 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존범위 뿐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 그리고 우주 전체를 아우른, 글자 그대로 '만물'을 공동체라고 역설한 것이다.


모든고민은 인간관계에 있다. 거꾸로 말하면 행복의 원천 또한, 인간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의 최소단위는? 나와 너. 두 사람이 있으면 거기서 사회가 형성되고 공동체가 탄생한다. 


'나와 너'를 기준점으로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꿔야 한다.



왜 '나'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가

자기에 대한 집착 = 자기중심적,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과제의 분리'를 하지 못하고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인정욕구의 진의를 생각해봐라.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얼마나 자기자신을 주목하는가. 자신의 욕구를 얼마나 만족시켜주는가.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인간은 얼핏 타인을 보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밖에 보이지 않는다. 

 즉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사람도 자기중심적이라 할 수 있다. '나'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의미에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자유롭게 사는 증거이다. 이를 자기중심적이라 하기보다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에 만 집착하는 삶이야 말로  '나'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양식이다.



나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우린 공동체 안에 내자리가 있다고 느끼는 것. 소속감을 갖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다.

인생의 주인공은 나인데 나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나는 인생의 주인공이면서도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일원이자 전체의 일부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본인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타인이란 나를 위해 뭔가를 해줄 사람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 행동하는 존재이며 내 기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은 나의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린 공동체의 일부이지 세계의 중심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소속감을 갖기를 원한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소속감이 가만히 있어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인생의 과제에 직면하는 것이다. 일, 교우, 사랑이라는 인간관계의 과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공동체에 공헌하겠다는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타인이 나를 위해 해주는 사람 이니 굳이 내가 나서서 행동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세계의 중심은 우리가 아니다. 내 발로 인간관계의 과제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를 생각해라. (단 인정받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선 안 될 것이고, 공동체 감각을 유지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공동체에 공헌 하는 길이다.


무언가를 주어야 내가 있을 곳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인가?

-> 그렇다.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다.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으라


인간관계의 입구에는 '과제의 분리' 가 있고 목적지에는 '공동체 감각' 이 있다. 공동체 감각이란 타인을 친구로 간주하고 그곳을 자신이 있을 곳이라 느끼는 것이다.


단, 공동체의 범위를 무한대로 생각해봐라. 


아들러가 말하는 공동체는 가정이나 회사같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까지 포함한다. 

(빵을 사므로 인해서 혜택을 받는 산유국 국민들까지.....)


그런데 왜이렇게까지 공동체범위를 무한대까지 늘려야 하는가?

만약 학교라는 공동체만이 내가 있을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학교에서 따돌림당하고 문제에 맞닥뜨리면 학교라는 시스템에 맞지 않거나 한다면... 여기 있어도 괜찮다는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그때 학교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자신은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더 작은 공동체인 가정으로 도피해서 틀어 박힐 수 있다. 심하게는 가정폭력이 있어 그마저도 못할 수 도 있다. 

 그런데 이때 '다른 공동체가 있다' 무엇보다 '더 큰 공동체가 있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떨 것 같은가?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교사에게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서 무너질 정도의 관계라면 그런관계는 없느니만 못한다.


관계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사는것은 타인을 위해 사는 부자유스러운 삶이다.


공동체 감각을 갖되 자유를 택해라. 눈앞의 작은 공동체에 집착하지 말아라. 보다 다른 '나와 너' , 보다 다양한 '사람들', 보다 큰 공동체는 반드시 존재한다.



칭찬도 하지 말고, 야단도 치지 말라

과제를 분리하면서 어떻게 원만한 관계를 만들까? 즉 어떻게 서로 협조하고 협력하는 관계로 발전시킬까.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수평관계' 라는 개념이다.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칭찬은 금물이다' 라는 입장을 취한다. 물론 체벌도 금지다. 야단치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칭찬한다의 속내는 무엇인가? 잘했어라고 칭찬을 듣는다면 왠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 않다.

 잘했다. 라는 말에 내포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뉘앙스가 불쾌하다. 칭찬한다는 행위가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 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칭찬의 배후에 있는 상하관계, 수직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남을 칭찬할 때 그 목적은 자기보다 능력이 뒤떨어지는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것이다. 거기에는 감사하는 마음도, 존경하는 마음도 일체 없다.


 누군가의 칭찬을 받고 싶다고 바라는 것. 반대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 이는 인간관계를 수직관계로 바라본다는 증거이다.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같지는 않지만 대등하다라는 뜻이다. 즉 수평이다. 회사원이든 가정주부든 모두 대등하다. 

열등감이란 수직관계에서 생기는 것이다. 모든사람이 같지는 않지만 대등한 수평관계에 있다면 열등 콤플렉스가 생길 여지가 없다. 

수직관계를 못벗어 난다면 직장상사에게 아부를 한다든지... 그런류의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다.



'용기 부여'를 하는 과정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받아들이면, 상대를 자신보다 아래라고 보고 개입을 한다.

 부모가 공부해!라고 말하는것이라든지... 우린 개입을 해선 안된다. 수평관계를 맺으면 개입도 사라지게된다.


만약 아픈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개입이 아니라 '지원'이 필요하다.


과제의 분리에서, 아이가 공부하는 것은 아이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과제이다. 부모와 교사가 대신 해줄 수 있는게 아니다. 

 아이가 공부를잘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스스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즉 지원, 돕는 것은 강제가 아니다. 과제를 분리한 상태에서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다.


말을 물가에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칭찬하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는다.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 라고 한다.


어떤사람이 과제를 앞에두고 망설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능력이 있든 없든, '과제에 맞설 용기를 잃은 것' 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 아들러의 심리학의 견해다. 잃어 버린 용기를 되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칭찬을 해주면 안된다. 칭찬을 받을수록 '나는 능력이 없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응?


만약 칭찬을 받고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수직관계에 종속되어 있으며 '나는 능력이 없다' 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 없다.

칭찬은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 이기 때문이다.


칭찬받는 것이 목적이 되면 결국은 타인의 가치관에 맞춰 삶을 선택하게 된다.


'용기부여'를 하기 위해서는 과제를 분리하고, 서로가 다름을 받아 들이면서 대등한 수평관계를 맺어야 한다.



.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려면

아이를 칭찬하지도 말고 야단치지도 말라. 아이가 대등한 파트너가 자네의 일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해봐라. 답은 나온다.

 

타인을 평가하지 말아라.

평가란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말이다.

 

평가는 타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 행동하게 된다.

 

어떻게 인간은 '용기'를 낼 수 있을까? ->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

 

열등감은 주관의 문제다. 나는 가치가 있다 or 없다.

 대체 어떻게하면 스스로 가치있다고 느낄수 있느냐?

 

답은 매우 간단하다: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다 라고 느끼면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

공동체, 즉 남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 고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좋다' 라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 고 느끼는 것.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

 '공동체 감각'이나 '용기 부여' 에 관한 말도 전부 이와 연결된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

 반론: 그렇다면 자리에 누워있는 할아버지, 아무힘도 안쓰는 갓난아기들은 가치가 없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타인을 '행위'의 차원에서 보고있다. 그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하지만

 

타인을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살펴야 한다.

 

타인이 무엇을 했는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존재하는 그자체를 기뻐하고 감사애햐한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가치가 있다.

 

설령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 큰 위안이 된다.

평가는 하지 말되, '고맙다' 라고 감사 인사 정도는 해주자 ^^.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다. 내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하든 안하든 상관하지 말고.

 

 

인간은 '나'를 구분할 수 없다.

일단 다른사람과, 한명이라도 좋으니 수평관계를 맺을 것

상사와는 수직으로 친구와는 대등관계가 아닌. 전부 수평관계로 봐야할 것이다.

 

누구 한사람이라도 수평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생활양식에 대전환이 일어날 것이다. 모든 인관관계는 수평이 될 것이다.

 

단 누구에게나 허물없이 행동하라는 게 아니다.

의식상에서 대등할 것, 그리고 주장할 것은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정욕구를 부정하라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을 부정한다.

타인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없다. 도리어 인정받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지 말라

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기대 같은 것은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

내가 나를 위해 내 인생을 살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살아준단 말인가?

이런사람이면 좋겠다는 타인의 기대를 따라 살게 된다. 진정한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가령 업무의 목표가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되면 그 일을 하기가 괴롭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전전긍긍하느라 나라는 존재를 억누르게 된다. 

결국 자기 멋대로 하라는 것은 아니다. '과제의 분리' 라는 개념을 알아야 한다.



과제를 분리하라

아이가 과제를 안했을때 부모는 아이에게 과제를 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가?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 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

타인의 과제에는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다.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마지막, Final으로, 가장뒷단에서)으로 발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를 생각해라.

아이가 공부를 안한다면 지망하는 학교 불합격 등 아이에게 결과가 가게 된다. 부모가 아니다.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타인의 과제를 버리라

은둔형 외톨이 역시 자신이 방을 빠져나오는 것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된다.




인간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하는 방법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 그 뿐이다. 그 선택에 타인이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상대가 나에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상대의 과제이지 내 과제가 아니다. 

분리란 이런거다. 


타인의 과제와 내 과제와의 분리.


ex) 상사가 사사건건 딴죽을 건다. 상사에게 인정받는 것이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일인가?

상사때문에 일을 못한다. -> 인생의 거짓말이다.  일을 내가 못하니깐 싫어하는 상사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누구도 내 과제에 개입시키지 말고, 나도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이야 말로 구체적이고도 대인관계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아들러의 심리학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으라.

과제의 분리를 이해하고 실천하면 인간관계가 단번에 자유로워 진다.

과제의 분리는 인간관계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입구다.

인간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다. 과제의 분리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보상을 바라서도 안 되고, 거기에 연연해서도 안 된다.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지 말아라. 아이가 끈을 묶는 것을 엄마가 도와 준다거나... 곤경에 직면해보지 못한 아이들은 곤경이 닥칠 때마다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인정욕구는 부자유를 강요한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며 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내 인생을 타인에게 맡기면 되니깐....

타인에게 인정받는 삶을 선택할 것이가, 아니면 인정 받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삶을 택할 것이가. 중요한 문제이니 생각해봐라.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고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면서 사는 인생. 너무 부자연 스럽지 않은가...


인정욕구란 누구에게도 미움을 받고 싶지 않다... 그런데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답은 하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면서 모든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


과제를 분리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이야 말로 자기 중심적인 발상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진로와 배우자감까지 간섭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자유로워 질까?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

경향성 - 본능적인 욕망, 충동적인 욕망. 


욕망이나 충동에 이끌려 사는 것.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는 돌멩이처럼 사는 것이 '자유' 일까? 그런 삶은 욕망과 충동의 노예가 될 뿐이다. 진정한 자유란 굴러 내려가는 자신을 아래에서 밀어 올려주는 태도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른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비탈길을 계속 내려가야할까? 그렇게 완성된 모습을 진정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단적으로 말해 자유란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 그것은 내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괴로운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다는 건 부자연스러운 동시에 불가능한 일이다.

자유를 얻으려면 타인에게 미움을 살 수 밖에 없다.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자신의 뜻대로 살수 없다. 


미움 받는 것을 두려워 하지마라.일부러 나쁜짓을 저지르라는 말은 아니다.


나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바라는 것은 내과제. 나를 싫어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다.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나는 거기에 개입할 수 없다. 


행복해지려면 미움받을 용기도 필요하다.



인간관계의 카드는 내가 쥐고 있다.

아버지에게 맞아서 사이가 안좋다 - 프로이트의 원인론

나는 아버지와 좋은관계를 맺고 싶지 않아서 맞은 기억을 꺼내들었다 -> 아들러의 목적론


어쩌면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않는편이 더 좋은 것이,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을 아버지 탓으로 핑계를 댈 수 있다.



인간 관계의 카드는 언제나 내가 쥐고 있다.

내가 먼저 다가갈 수 있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사람들은 대게 그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타인이 바라는 것을 충족 시키는 삶을 산다.

과제의 분리를 배우면 모든 카드를 내가 쥐고 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 물론 내가 상대를 달라지게 하려고 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을 조종하려는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변해도 상대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타인을 조종해서는 안되고 조종할 수도 없다.


인관 관계라고 하면 보통 두사람의 관계 혹은 다수와의 관계를 떠올리지. 그런데 자기 자신이 먼저다. 인간관계에서 인정받는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으면 인간관계의 카드는 언제나 남이 가질 수 밖에 없다. 


인생의 카드를 남에게 맡길 것인가, 내가 쥘 것인가의 문제다.


ex) 내가 먼저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변했다. 그러더니 늙은 아버지가 어느날 고맙다라고 감사의 표현을 했다. 나는 아버지를 물가에 모시고 가는것 까지 했고 아버지는 그 물을 마셔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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