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의 심리학 -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왜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가


자기자신의 단점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신이 ' 나 자신을 좋아하지 말자' 라고 결심 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장점을 보지 않고 단점에만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고, 깊은 상처를 입는 것을 무서워해서 이런관계에 휘말리느니 처음부터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 목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 받지 않는 것' 이되게 된다.



ex) 적면공포증에 걸린 어떤 여학생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학생 한테 고백을 못함.

가장 두렵고 피한 것은 그남자에게 차이는 것이다. 그래서 적면공포증때문에 고백을 못한다고 스스로 정하고 목적을 달성해버림. 상처는 받지 않게됨. 일종의 실패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보험임


-> '지금의 나' 를 받아들이고, 결과가 어떻든지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가지는게 필요하다. 이를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 라 한다.



모든 고민은 '인관관계에서 비롯된 고민' 이다.

인간관계를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자신을 싫어하게 된 사람이 있다. 자신을 싫어함으로써 인간관계로부터 도망 친것이다. 

인간의 고민은 전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아들러의 주장)



열등감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열등감은 누군가와의 비교 다시말해 인간관계를 통해 만들어 낸 주관적인 감정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열등감은 '객관적 사실' 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 에 있다.


우리는 객관적 사실을 움직이지는 못하나 주관적 해석은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주관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다.


가치의 문제도 최종적으로는 인간관계로 환원된다.(돈의 가치, 혼자 세상에 남았을때 돈은 필요없게 된다.)

-> 모든 문제는 인간관계로부터 시작된다.



변명으로서의 열등 콤플렉스


인간은 누구아 열등감이 있다.(아들러)

우월성 추구 - 인간은 무기력한 상태로 태어나서 무기력한 사애를 벗어나려는 보편적인 욕구를 갖고 있다. 

-> 향상되기를 바라는 것,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는 것



열등감은 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 내면에 자리한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 더욱 전진하려고 한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한발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열등감 자체는 그다지 나쁜 게 아니다. 노력과 성장을 자극하는 계기(아들러 왈)


콤플렉스 - 복잡하게 얽힌 도창 상태의 심리

우리는 열등감과 열등 콤플렉스를 잘못 이해하면 안된다.

열등 콤플렉스 -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



ex) 학력이 낮으면 취직자리도 출세 기회도 얻지 못한다.

-> '무늬만 인과법칙 ' 이라는 용어.


원래는 어떤 인과관계도 없는 것을, 마치 중대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설명하고 납득한다.


ex) 내가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린시절 부모님이 이혼한 탓이에요! (프로이트워 원인론)

하지만 아들러의 목적론 입장에서는 '무늬만 인과법칙' 이라며 경계함.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 못한다. -> 성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 간단히 말해서 한 발 앞으로 내미는 것이 무섭다.



그 한 발이 무서우면 안돼!

현실적인 노력을 하고싶지 않다. 지금 누리는 즐거움(놀거나 취미를 즐기는 시간)을 희생해서 변하고 싶지 않다.

생활 양식을 바꿀 용기가 없다!! 다소 불만스럽고 부자연스럽지만 지금 이대로가 더 편한 것이다!!!!!!!!!




자랑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

A라서 V할 수 없다.

A만 아니면 V 할 수 있다.


열등감을 오랫동안 참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모자람을 느끼는 상태이고 어떻게 모자란 부분을 채울것인가 ?

가장 건전한 형태는 노력과 성장을 통해 채우려는 것이다. 학문에 더욱 힘쓰거나 연습에 매진하거나 일에 열정을 쏟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용기를 못내는 사람이 열등 콤플렉스에 빠진다.


학력만 낮으면 성공할 수 없다. = 학력만 높으면 쉽게 성공할 수 있다.

학력에 덮어 나의 모습이 안보이지만 나는 지금 우월하다라는 것을 암시한다.


열등콤플렉스는 우월 콤플렉스로 발전한다.

(못난 보상, 건전하지 못한 방법으로 보상을 한다)


-> '거짓 우월성' 에 빠진다.

예로 들면 '권위 부여'. 자신이 권력자 학급반장에서부터 저명인사까지 각별한 사이임을 내세우거나...


'나' 라는 사람이 우월한 것처럼 꾸미게 된다.

권위의 힘을 빌려서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은 결국 다른 사람의 가치관에 맞춰 다른사람의 인생을 살게 된다.



또한, 자기공을 자랑하고 뽐내고 싶어하는 사람, 과거의 영광에 매달려 걸핏하면 가장 빛나던 시절의 우척을 늘어놓는 사람. 이것 역시 우월 콤플렉스라 할 수 있다.


응? 자기자신 과거 자랑이 웬 우월 콤플렉스?


-> 일부러 말로 자랑하며 뽑내는 사람은 외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 

아들러 역시 지적했다. "만약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열등감을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


자랑은 열등감의 발로다. 정말로 자신 있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는다. 열등감이 심하니까 자랑하는 거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일부러 과시하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런 나' 를 인정해 주지 지 않을까봐 겁이 난다. 이는 완벽한 우월 콤플렉스다.


열등콤플렉스와 우월콤플렉스는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불행 자랑'


성장 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불행을 마치 뽐내듯 말하는 사람. 타인이 위로를 하면 "너는 내심정이 어떤지 몰라" 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는 사람.

불행하다는것을 특별하다고 내세운다. 그렇다면 다른사람들은 그부분에 얘기를 안할 것이고 그사람은 다른사람 보다 우위에 있고 '특별' 해지는 것이다. 마치 '특별한 존재' 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열등감을 무기처럼 사용하게 된다...

"오늘날의 연약함은 매우 강한 권력을 지닌다"


ex) 갓난 아기는 어른들을 지배한다....


.


인생은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다.

아들러의 우월성 추구는 남을 밀어내고 올라가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다. 

우월성 추구란 자신의 발을 한 발 앞으로 내딛으려는 의지를 말한다. 


진정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와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다.


인간은 같지는 않지만 대등한 존재다.  //어린아이부터 어른 노인 까지..

차이는 존재하지만, 상하 구별은 없어야 한다. 


나와 같은 한 인간으로 '인간 대우'를 진지하게 해라. 

남들에 비해 앞서 걷거나 뒤에 쳐지거나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 말로 가치가 있다.


내가 나로서 살려고 할 때, 경쟁은 필히 방해가 된다.경쟁상대는 친구가 될 수 없다.




내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나뿐이다.


인간 관계의 중심에 '경쟁'이 있으면 인간은 영영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행에서 벗어 날 수 없다.


경쟁이나 승패를 의식하면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이 열등감이다. 늘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고 이 사람에 게는 이겼어, 저 사람에게는 졌어, 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게 계속발전되면 주변사람들, 세계를 적으로 느끼게 된다. 나를 무시하고 비웃고 무서운 장소라고 여기게 된다.

경쟁의 무서움... 계속 이긴다고 할지라도 경쟁속에서 사람은 마음이 편할 새가 없다. 


하지만 실제로 다른 삶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을까? 24시간 동안? 호시탐탐 공격하려고 기회를 노리는가?

절대 아니다...


"네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너뿐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없다.


-> 인간관계를 경쟁으로 바라보고 타인의 행복을 '나의 패배'로 여기기 때문에 축복하지 못한 거다.


경쟁의식에서 탈출하면 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해방된다. 누군가에게 이길 필요도 없다. 사람들을 진심으로 축복할 수 있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줄 수 있다.


중요한건 지금부터다. '사람들은 내친구다' 라고 느낄 수 있다면 세계를 보는 눈은 달라질 것이다.




권력투쟁에서 복수로


사적인분노-금방식는다. 그 사람이 '목적' 을 가지고, 진짜 화났을 때 '권력투쟁'을 위해 싸움을 거는 것.

공적인분노-사회의 모순 및 부정에 대한 분노


ex) 아이가 어른에게 장난을 치는것. (목적은 싸우는 것에 있다.)


친구와 정치얘기를 하다 인신공격을한다. 평소에 못마땅 하게 생각한 권력투쟁을 하는 것임.

근데 이런 권력투쟁을 맞받아 친다 해도 상대는 물러서지 않고 다음 단계에 돌입. 즉 복수 단계에 돌입할 것이다. 다른 장소 그리고 시간 에서 언젠가는 발현 될 것이다.


아이가 학교를 안가고 손목을 긋는것도 현재의 목적(부모에 대한 복수)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분노의 목적은 복수, 권력투쟁이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가 아니다.

상대가 싸움을 걸어온다면 서둘러 싸움에서 물러나라. 상대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 

분노를 이용하지 말아라. 분노란 어차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도 의사소통을 할 수 이다. 


언어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해라. 논리적인 말을 믿어라. 

또한, 아무리 자신이 옳아도 상대를 비난하지 말아라. 많은 사람이 빠지는 인간관계의 함정이다. 


인간관계에서 나는 옳다 고 확신하는 순간, 권력투쟁에 발을 들이게 된다. 


나는 옳다. 상대는 틀렸다. 그렇게 생각한 시점에 주장의 타당성에서 인간관계의 문제로 옮겨간다. 내가 옳다. 이사람은 틀렸다. 그러니까 나는 이겨야 한다. 승패를 다투게 되고 이건 권력투쟁이 되게 된다. 


내가 옳다고 믿는다면 다른사람이 어떻든 거기서 마무리 되어야 한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 사과하는 것, 권력투쟁에서 물러나는 것 이런것들이 전부 패배는 아니다. 


우월성 추구란 타인과 경쟁하는 것과는 상관없다. 

경쟁이나 승패의 안경을 벗어야 비로소 사진을 바로 보게 되고,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과제를 어떻게 극복 할 것인가.


인생의 과제


행동의 목표 - 자립할 것,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

뒷받침 하는 심리적 목표- 내게는 능력이 있다.

                            사람들은 내 친구다.


->한인간으로 자립하여 사회와 조화를 이루며 산다.


인생의 과제 (인간관계) - 일의과제, 교우의 과제 , 사랑의 과제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 살고자 할 때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인간관계. 그것이 인생의 과제이다. 


일의과제 - 어떤일이든 혼자서 끝낼 수 없다. 사람과 사람들이 하는 인간관계가 얽혀 있다.


ex) 실수로 회사에 거액의 손실을 힙혔다. -> 비판과 질타를 받는다. 소중한 나의 존엄성에 상처가 나는 것이 싫어서 일의 과제를 포기하는 은둔형 외톨이 들이 있다.



붉은 실과 단단한 쇠사슬

교유의 과제 - 일을 벗어난, 더 넓은 의미에서의 친구관계. 

친구는 많을 수록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과연 그럴까. 친구와 지인의 수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거리와 깊이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타인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기 위한 심리학이다. 

-> 즉 내가 첫받을 내딛기를 기다린다.



사랑의 과제 - 연애관계, 가족관계(부모자식 관계)


아들러는 상대를 구속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상대가 행복하다면 그 모습을 순순히 축복해주 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 생각한다. 서로를 구속하는 관계는 결국 깨지게 되어있다.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다.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우월함을 과시할 필요도 없는, 평온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라 할 수 있다. 


함께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면,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부모자식관계는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우선은 피하지 말라.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관계일지라도 마주하는 것을 뒤로 미뤄서는 안된다. 일단은 마주 볼 것이다. 가장 해서는 안되는 것이 '이대로' 멈춰 서 있는 것이다.


인간이 혼자 사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개인으로서의 자립과 사회에서의 협조를 목표를 내걸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일, 교우, 사랑이라는 세가지 과제를 넘어서라.



인생의 거짓말을 외면하지 마라.

여러가지 구실을 만들어서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는 사태를 가리켜 '인생의 거짓말' 이라고 한다.

남탓, 환경탓....



소유의 심리학에서 사용의 심리학으로

무엇이 주어지느냐 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결정은 내가 하낟.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며 동시에 사용의 심리학이다. 

인간은 과거 트라우마에 휘청거릴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인간은 용기가 부족하고, 인생의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과연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시작하며

인간은 변할 수 있다.

세계는 단순하다.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 단 그런 '용기'가 자신한테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있다. 객관적인 세계에 우리는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보는 세계의 눈은 전부 달라서 공유할 수 가 없다.



아들러의 심리학은 고루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 이해의 진리이자 도달점이라 할 수 있다.



트라우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원인론 vs 목적론


원인론: 지금 현재의 결과는 과거에 의한 영향으로 나온 결과이다.



목적론: 사람은 과거 또는, 트라우마와 상관없이 현재 상황의 목적에 맞게 행동한다.

(가령, 방안에 틀여박혀 살며 인간관계를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는 귀찮거나 상처받을 생각에 인간관계를 하기 싫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또는 밖으로 나가기 싫다는 목적이라든지...)

이때 과거의 상처는 현재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스스로 인간관계를 못한다는 공포심을 지어내어 원하는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예시로는, 가족이랑 못 놀고 나는 일중독자다. -> 그냥 일을 가족보다 더 좋아하고 싶기 때문에 일중독자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일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목적(시간이 없다 이런건 일중독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스스로 지어낸 불안, 공포, 변명)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떠한 '목적'을 따라 살고 있다.

이것이 목적론이다.




인간은 분노를 지어낸다.


분노란 언제든지 넣었다 뺴서 쓸 수 있는 도구이다.

어떠한 상황이든, 정중하게 말로 할 수 있다.

분노란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쓸 수 있다.

단지 누군가에게 위압을 가하기 위해서, 또는 싫기 때문에  '분노'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목적론에 입각한 설명)





과거에 지배받지 않는 삶


우리는 감정에 지배받지 않고, 과거에도 지배받지 않는다. 우린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지을 순 없다.

가능성을 생각해라. 인간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해라.

우리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인간을 기계처럼 바라보면서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원인론에 입각한 것이 프로이트가 주장한 원인론이다....





소크라테스, 그리고 아들러



당신은 '이대로' 좋습니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이다.



나의 불행은 스스로 '선택' 한 것

무엇이 주어졌는가에 집착한다고 해서 현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교환이 가능한 기계가 아니다.우리에게 필요한것은 교환이 아니라 고쳐나가는 것이다!


불행한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선택을 한 경우이다.




소크라테스의 역설

 행위로서의 악은 숱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어떤 범죄자든지 순수하게 나쁜 짓을 하려는 의도로 한 것이 아니다.

모든지 마땅한 이유가 있다. 당사자에겐 이 또한, 선의 수행이다. 


그러므로 불행한 사람은 어느 단계서인가 불행한 상태를 택했다. 자신에게 불행한 상태를 선이라고 판단 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하지 않겠다' 고 결심한다.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생활양식(인생을 사는 방식) 을 스스로 선택한다고 주장한다.

그사람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의미 부여방식을 집약시킨 개념이 생활양식이라 생각하면된다. 좁게는 성격에서부터 넓게는 그 사람의 세계관이나 인생관 까지 포함한다.


ex) 나는 비관적인 사람이야 -> 비관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질이나 성격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이라 생각하지만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생활양식을 스스로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예로들면 불행한 상태, 꼬인 성격을 직접 선택 했다라고도 할 수 있다. 다행인것은 생활양식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선택하는 것도 가능 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라고 결심 했기 떄문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생활양식을 선택한다. 그런데도 변하지 않는것은 생활양식을 

바꾸지 않겠다고 끊임없이 결심해왔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하면 불편하고 부자연스러워 지금의 생활방식에 익숙해져서 이대로 변하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에 이대로의 나로 살아간다면 눈앞에 닥친일을 어떻게 대처야할 지 , 그 결과 어떤일이 일어날지 경험을 통해 주측 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생활양식을 선택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서 불안한 삶을 살 수 있기 떄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대로의 나로 사는 것이 더편하다고 생각하고 살게된다.

변하고는 싶지만 변하는 것이 두렵다 라고 할 수 있겠다....

아들러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이다.우리는 행복해질 용기가 부족하다.




나의 인생은 '지금, 여기' 에서 결정난다.

먼저 지금의 생활양식을 버리겠다고 결심해라. 생활양식을 바꾸는것을 통해서 실패(뭔가에 도전을 한다거나 새로운거에 도전)를 한들 어떠한가.

단지 한순간일 뿐이고 다른길을 또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한발 한발 나아갈 수 있다.

시도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도 없다.



해야할 일을 두고 '할 수 없는 이유' 를 이리저리 찾는게 더 고달픈 삶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변할 수 밖에 없다' 자네는 '자네'인 채로 그저 생활양식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다시한번 말하자만 아들러의 목적론은 아래와 같다.


-> 지금까지의 인생에 무슨 일이 있었든지 앞으로의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 지금 여기' 를 사는 나이다.

안드로이드 어플리케이션(응용프로그램) 실행

 안드로이드는 동시에 여러 안드로이드 응용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고, 큰 지연없이 응용프로그램(애플리케이션) 사이에서 사용자 스위치를 할 수 있는 Multi user, multi tasking 시스템입니다. 리눅스 커널은 멀티태스킹을 처리하고, 응용프로그램 실행은 리눅스 프로세스를 기반으로 진행되어집니다.



리눅스 프로세스

리눅스는 모든 사용자에게 OS로 추적할수있는 번호인 고유한 사용자 ID를 할당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리눅스처럼 사용자 권한으로 보호되는 개인 리소스에는 접근할 수있으나 다른 사용자의 개인리소스에는 절대 접근할수없습니다. 

따라서 사용자를 격리하기위해서 SandBox 라는게 만들어집니다. 


 안드로이드에서 모든 응용프로그램의 패키지는 고유한 사용자 ID값을 가지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예를든다면, 안르도이드 앱은 리눅스에서 고유한 사용자에게 해당됩니다. 그렇기때문에 다른 앱의 리소스에 엑세스할수없게됩니다.


응용프로그램은 서로 다른 process와 VM에서 실핼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응용프로그램과 process는 1:1관계이지만, 필요시, 하나의 응용프로그램을 여러개의 프로세스에서 실행하거나, 여러 앱을 같은 프로세스에서 실행할 수도 있습니다.



Life Cycle 생명주기 

앱의 생명주기는 자바 android.app.Application 클래스로 대응되는 리눅스 프로세스 안에서 캡슐화가 됩니다. runtime이 onCreate() 함수를 호출할 때 각 응용프로그램에 대한 Application 객체가 시작됩니다. 원칙적으로 응용프로그램은 onTerminate()로 런타임 호출을 종료하지만, 응용 프로그램에 의존하지 않을수도있습니다. 런타임이 마지막 onTerminate()를 호출할 기회가 있기전에 하부 리눅스 프로세스가 종료되기도 합니다. Application 객체는 프로세스에 첫번째로 생성되는 구성요소이자 마지막으로 소멸되는 구성요소입니다.



응용프로그램 시작

 안드로이드 구성요소중 하나가 실행을 위해 초기화되면, 응용프로그램은 시작됩니다. 어떤 구성요소든 어플리케이션(응용프로그램)에 대한 진입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일단 첫번째 구성요소(컴포넌트라고도 합니다.)가 시작되엇고, 프로세스가 실행되기 전이라면 리눅스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은 시동순서를 거치게됩니다.


1. 리눅스 프로세스를 시작합니다.

2. 런타임을 생성합니다.

3. Application 클래스의 인스턴스를 생성합니다.

4. 응용프로그램을 위한 진입점 구성요소를 생성하게 됩니다.


새로운 리눅스 프로세스와 runtime을 설정하는 작업은 결코 짧은 시간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작업은 성능을 저하시키고 사용자 경험에 두드러진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스템은 시스템 부트에 Zygote라는 특별한 프로세스를 시작하여, 안드로이드 응용프로그램의 시작 시간을 단축하려고 합니다. 


 Zygote는 미리 로드된 핵심 라이브러리의 전체 세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응용프로그램 프로세스는 모든 응용프로그램에서 공유되는 핵심 라이브러리를 복사하지않고, Zygote프로세스에서 fork합니다.



응용프로그램 종료

프로세스는 응용프로그램이 시작될때 생성되며, 시스템 자원이 해제될때 종료됩니다. 사용자가 나중에 응용프로그램(application)을 재 실행할 수 있는 경우가 있기때문에 Runtime은 시스템 전체 자원이 부족해지기 전까지는 현재 살아있는 응용프로개름의 모든 자원을 소멸시키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모든 구성요소가 소멸해도 응용프로그램이 자동적으로 종료되지않습니다.


 시스템 자원이 부족할 때 어떤 프로세스를 죽여야할지는 Runtime에 달려있습니다. 이러한 결정을 하기 위해 시스템은 애플리케이션의 가시성 및 현재 실행중인 구성요소(컴포넌트)에 따라 각각의 프로세스에 순위를 부과합니다. 낮은 순위의 프로세스는 높은 순위의 프로세스보다 먼저 강제로 종료됩니다. 프로세스의 순위를 높은 순서대로 보면 다음 아래와 같습니다.


포그라운드(가장 앞단, UI컴포넌트 쪽)

 전면에 보이는 컴포넌트를 가진 애플리케이션, 원격 프로세스에서 전면의 액티비티에 바인딩된 서비스, 실행중인 브로드캐스트 리시버가 해당됩니다.


화면에 보이는 프로세스

 화면에 보이나 부분적으로 숨겨진 컴포넌트(구성요소)를 가진 애플리케이션입니다.


Service 서비스

 백그라운드에서 실행중이며, 화면에 보이는 컴포넌트와 연결되어있지않은 서비스가 해당합니다.


Background 백그라운드

 화면에 보이지않는 액티비티, 대부분의 애플리케이션이 가지는 프로세스 레벨입니다.


빈프로세스

 활성화된 구성요소가 없는 프로세스, 빈 프로세스는 응용프로그램의 시작시간을 개선하기 위해 유지되는편이지만, 시스템이 자원을 회수할때 가장 먼저 종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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