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심리학과 전체론

과제의 심리학은 너는너 나는나 선긋기 아닌가? 개인 심리학은 개인을 고립시키는게 아닌가?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은 모두 하나다. 인간은 통일된 전체이다.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나와 감정을 떼어놓고 말할 수 없다. 잠시 화가나서 그랬다. 감정에 치우쳤다(이는 말이안된다.)

전체로서의 나를 생각해라.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하다. 너무 밀착되어 있으면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도 곤란하다. 과제의 분리는 타인을 밀어내는 발상이 아니다.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의 실타래를 푸는 개념이다. 


과제의 분리는 인간관계의 출발점이다.



인간관계의 목표는 '공동체 감각'을 향한 것

출발은 과제의 분리. 그렇다면 목표는? '공동체 감각'에 있다.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 개념이다.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거기서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공동체 감각' 이다. 

보통 우린 공동체라 하면 가정, 학교, 직장, 지역사회를 생각한다.

아들러는 가정이나 학교, 직장,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국가와 인류 등을 포괄한 전체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 축, 나아가서는 동식물과 무생물까지도 공동체에 포함된다고 했다.


다시말해 '공동체'라고 했을 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존범위 뿐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 그리고 우주 전체를 아우른, 글자 그대로 '만물'을 공동체라고 역설한 것이다.


모든고민은 인간관계에 있다. 거꾸로 말하면 행복의 원천 또한, 인간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의 최소단위는? 나와 너. 두 사람이 있으면 거기서 사회가 형성되고 공동체가 탄생한다. 


'나와 너'를 기준점으로 자기에 대한 집착을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바꿔야 한다.



왜 '나'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가

자기에 대한 집착 = 자기중심적,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과제의 분리'를 하지 못하고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인정욕구의 진의를 생각해봐라.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고 얼마나 자기자신을 주목하는가. 자신의 욕구를 얼마나 만족시켜주는가.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인간은 얼핏 타인을 보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밖에 보이지 않는다. 

 즉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사람도 자기중심적이라 할 수 있다. '나'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의미에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자유롭게 사는 증거이다. 이를 자기중심적이라 하기보다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에 만 집착하는 삶이야 말로  '나'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자기중심적인 생활양식이다.



나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우린 공동체 안에 내자리가 있다고 느끼는 것. 소속감을 갖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다.

인생의 주인공은 나인데 나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나는 인생의 주인공이면서도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일원이자 전체의 일부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본인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타인이란 나를 위해 뭔가를 해줄 사람에 불과하다.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 행동하는 존재이며 내 기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인은 나의 기대를 채워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린 공동체의 일부이지 세계의 중심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있어도 좋다는 소속감을 갖기를 원한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소속감이 가만히 있어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인생의 과제에 직면하는 것이다. 일, 교우, 사랑이라는 인간관계의 과제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한다면 공동체에 공헌하겠다는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타인이 나를 위해 해주는 사람 이니 굳이 내가 나서서 행동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세계의 중심은 우리가 아니다. 내 발로 인간관계의 과제에 다가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를 생각해라. (단 인정받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선 안 될 것이고, 공동체 감각을 유지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공동체에 공헌 하는 길이다.


무언가를 주어야 내가 있을 곳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인가?

-> 그렇다. 소속감이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다.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으라


인간관계의 입구에는 '과제의 분리' 가 있고 목적지에는 '공동체 감각' 이 있다. 공동체 감각이란 타인을 친구로 간주하고 그곳을 자신이 있을 곳이라 느끼는 것이다.


단, 공동체의 범위를 무한대로 생각해봐라. 


아들러가 말하는 공동체는 가정이나 회사같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까지 포함한다. 

(빵을 사므로 인해서 혜택을 받는 산유국 국민들까지.....)


그런데 왜이렇게까지 공동체범위를 무한대까지 늘려야 하는가?

만약 학교라는 공동체만이 내가 있을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학교에서 따돌림당하고 문제에 맞닥뜨리면 학교라는 시스템에 맞지 않거나 한다면... 여기 있어도 괜찮다는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을 생각해보자.

 그때 학교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자신은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더 작은 공동체인 가정으로 도피해서 틀어 박힐 수 있다. 심하게는 가정폭력이 있어 그마저도 못할 수 도 있다. 

 그런데 이때 '다른 공동체가 있다' 무엇보다 '더 큰 공동체가 있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떨 것 같은가?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더 큰 공동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교사에게 이의를 제기한다고 해서 무너질 정도의 관계라면 그런관계는 없느니만 못한다.


관계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사는것은 타인을 위해 사는 부자유스러운 삶이다.


공동체 감각을 갖되 자유를 택해라. 눈앞의 작은 공동체에 집착하지 말아라. 보다 다른 '나와 너' , 보다 다양한 '사람들', 보다 큰 공동체는 반드시 존재한다.



칭찬도 하지 말고, 야단도 치지 말라

과제를 분리하면서 어떻게 원만한 관계를 만들까? 즉 어떻게 서로 협조하고 협력하는 관계로 발전시킬까.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수평관계' 라는 개념이다.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칭찬은 금물이다' 라는 입장을 취한다. 물론 체벌도 금지다. 야단치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칭찬한다의 속내는 무엇인가? 잘했어라고 칭찬을 듣는다면 왠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 않다.

 잘했다. 라는 말에 내포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뉘앙스가 불쾌하다. 칭찬한다는 행위가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 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칭찬의 배후에 있는 상하관계, 수직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 남을 칭찬할 때 그 목적은 자기보다 능력이 뒤떨어지는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것이다. 거기에는 감사하는 마음도, 존경하는 마음도 일체 없다.


 누군가의 칭찬을 받고 싶다고 바라는 것. 반대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 이는 인간관계를 수직관계로 바라본다는 증거이다.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온갖 '수직관계'를 반대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들자고 주장한다.

 같지는 않지만 대등하다라는 뜻이다. 즉 수평이다. 회사원이든 가정주부든 모두 대등하다. 

열등감이란 수직관계에서 생기는 것이다. 모든사람이 같지는 않지만 대등한 수평관계에 있다면 열등 콤플렉스가 생길 여지가 없다. 

수직관계를 못벗어 난다면 직장상사에게 아부를 한다든지... 그런류의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다.



'용기 부여'를 하는 과정

인간관계를 수직으로 받아들이면, 상대를 자신보다 아래라고 보고 개입을 한다.

 부모가 공부해!라고 말하는것이라든지... 우린 개입을 해선 안된다. 수평관계를 맺으면 개입도 사라지게된다.


만약 아픈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개입이 아니라 '지원'이 필요하다.


과제의 분리에서, 아이가 공부하는 것은 아이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과제이다. 부모와 교사가 대신 해줄 수 있는게 아니다. 

 아이가 공부를잘할 수 있도록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스스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것이다.

 즉 지원, 돕는 것은 강제가 아니다. 과제를 분리한 상태에서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이다.


말을 물가에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칭찬하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는다.


수평관계에 근거한 지원을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 라고 한다.


어떤사람이 과제를 앞에두고 망설이는 것은 그 사람에게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능력이 있든 없든, '과제에 맞설 용기를 잃은 것' 이 문제라고 보는 것이 아들러의 심리학의 견해다. 잃어 버린 용기를 되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칭찬을 해주면 안된다. 칭찬을 받을수록 '나는 능력이 없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응?


만약 칭찬을 받고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수직관계에 종속되어 있으며 '나는 능력이 없다' 고 인정하는 것과 다름 없다.

칭찬은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 없는 사람에게 내리는 평가' 이기 때문이다.


칭찬받는 것이 목적이 되면 결국은 타인의 가치관에 맞춰 삶을 선택하게 된다.


'용기부여'를 하기 위해서는 과제를 분리하고, 서로가 다름을 받아 들이면서 대등한 수평관계를 맺어야 한다.



.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려면

아이를 칭찬하지도 말고 야단치지도 말라. 아이가 대등한 파트너가 자네의 일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해봐라. 답은 나온다.

 

타인을 평가하지 말아라.

평가란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말이다.

 

평가는 타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 행동하게 된다.

 

어떻게 인간은 '용기'를 낼 수 있을까? ->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

 

열등감은 주관의 문제다. 나는 가치가 있다 or 없다.

 대체 어떻게하면 스스로 가치있다고 느낄수 있느냐?

 

답은 매우 간단하다: 나는 공동체에 유익한 존재다 라고 느끼면 자신의 가치를 실감한다.

공동체, 즉 남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 고 느끼는 것.


타인으로부터 '좋다' 라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 고 느끼는 것.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

 '공동체 감각'이나 '용기 부여' 에 관한 말도 전부 이와 연결된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

 반론: 그렇다면 자리에 누워있는 할아버지, 아무힘도 안쓰는 갓난아기들은 가치가 없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타인을 '행위'의 차원에서 보고있다. 그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하지만

 

타인을 '행위'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살펴야 한다.

 

타인이 무엇을 했는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존재하는 그자체를 기뻐하고 감사애햐한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가치가 있다.

 

설령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 큰 위안이 된다.

평가는 하지 말되, '고맙다' 라고 감사 인사 정도는 해주자 ^^.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없다. 내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하든 안하든 상관하지 말고.

 

 

인간은 '나'를 구분할 수 없다.

일단 다른사람과, 한명이라도 좋으니 수평관계를 맺을 것

상사와는 수직으로 친구와는 대등관계가 아닌. 전부 수평관계로 봐야할 것이다.

 

누구 한사람이라도 수평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생활양식에 대전환이 일어날 것이다. 모든 인관관계는 수평이 될 것이다.

 

단 누구에게나 허물없이 행동하라는 게 아니다.

의식상에서 대등할 것, 그리고 주장할 것은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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